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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아시아의 영웅, 현대 설립자 정주영 회장은 어떤 사람이었나?(소, 명언, 자서전)시사/인물 2023. 2. 2. 13:40728x90반응형
본명: 정주영
나이: 1915년 11월 25일
사망: 2001년 3월 21일(향년 85세)
출생: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
본관: 하동 정씨
호: 아산
학력: 송전공립보통학교(졸업)
키: 175cm
몸무게: 72kg
혈액형: O형
1. 현대그룹 설립자
대한민국 기업인 정주영은 현대그룹의 설립자이자 명예회장입니다.
정주영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함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으로 그의 동생들과 아들들이 모두 회장이며 범 현대가 특유의 기업 문화 때문에 왕회장이라고도 불리죠.
회장들 중의 왕 정주영은 1970년대 전성기 시절 다른 재벌들도 현대가 모든 사업을 수주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건설 사업 의뢰가 들어왔었으며 현대의 하청회사로 시작해 중견 기업이 된 회사들이 많아서 진짜 회장들에게 회장님 대접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현대가만큼 유명한 삼성의 이씨 일가는 철저하게 정주영 개인의 자수성가로 성장한 현대와 달리 예전부터 이미 부를 가지고 있던 집안이었어서 현대가만큼 인기가 있진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정주영은 한국 경제 성장의 전설이라 불리죠.
2. 아시아의 영웅
2006년 당시에는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영웅들 리스트에 정주영이 포함되기도 했습니다.
60주년을 기념해 발행한 '아시아의 영웅 60년'이라는 제목의 특집판에서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가난에 시달리던 한국을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으로 이끌었다.'라고 설명하며 비즈니스 분야 영웅으로 선정한 이유를 밝혔죠.
이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위대한 아시아인들을 선정한 것이며 리스트에 포함된 한국인은 정주영을 포함해서 강철환, 백남준 총 3명이라고 합니다.
또한 한국갤럽이 2019년에 조사한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리스트에서 기업인 신분으로는 최고 순위인 전체 6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3. 대북 사업의 선구자
일명 '정주영 소떼 방북'으로 불리는 사건은 미국의 뉴스 전문 채널인 CNN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됐을 정도로 정주영 하면 떠올려지는 사건인데요.
정주영은 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되어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대북 사업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는데 1998년 6월 16일 판문점을 통해 북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기 소르망'은 소떼 방북 이벤트를 가리켜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며 감탄하기도 했죠.
이후 여러번 더 방북하며 총 1001 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했고 호화 유람선 금강, 봉래호를 이용한 금강산 관광을 성사시켰으며 1999년에는 현대건설이 평양에서 체육관 건설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정주영 사후인 2003년에 완공한 뒤에는 '류경정주영체육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죠.
4. 명언
정주영은 상징적인 인물인 만큼 많은 명언들로 유명한데 대체로 성실과 도전 노력을 강조하는 어록들이 많습니다.가장 대표적으로 있어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이봐 채금자, 해보기나 했어?'가 있는데요.
이외에도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야 하며,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 나아가야 한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다하는 최선',
'사업은 망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인간은 한번 신용을 잃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사람은 의식주를 얼마나 잘 갖추고 누리며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얼마나 미치면서 사느냐가 중요하다.'등등 굉장히 많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5. 소학교 졸업
세기의 도전자 정주영의 학력은 송전공립보통학교 졸업입니다.
정주영은 학력을 딛고 일어서서 현대그룹이라는 거대 재벌을 일군 역사가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와 처절한 가난 속에서 이루어 낸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과 나란히 하고 있기 때문에 산업화에서는 굉장히 상징처럼 기억되는 인물인데요.
또한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큰 기업을 이뤄내고 최고의 부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가난한 경험을 기억하며 평생 동안을 청렴하고 검소한 삶을 살며 아직까지도 많은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기업인 중 한 명으로 꼽히죠.
심지어 한 일화로는 회장 재임 시절 자신의 집에 도둑이 든 적이 있었는데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없어서 어이가 없어진 도둑이 '무슨 왕회장집이 이래?'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6. 1988년 서울 올림픽
산업뿐만 아니라 정주영은 1988년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일등 공신으로도 유명한데요.그 당시 경쟁 도시는 일본의 나고야였는데 나고야 올림픽 유치위원회에서는 비싼 시계를 IOC 위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며
홍보했다고 합니다.하지만 정주영은 IOC 위원들이 머무는 숙소에 꽃바구니만 돌리며 홍보를 했는데 승산이 없을 것 같던 올림픽 유치는 막상 다음날 리셉션이 되니 각국 IOC 위원들은 시계보다도 꽃에 대해 더 많은 얘기를 해 일본 측을 당황하게 했죠.
이렇게 정주영은 물량보다도 성의로써 친밀해지자며 과감히 밀어붙였고 그 결과 최종 투표에서 서울이 나고야 를 52-27로 누르고 1988년도 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성공하며 가난한 나라가 올림픽을 유치하는 88 올림픽의 기적을 이뤄냈습니다.
7. 퇴직금 1위
정주영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퇴직금을 지급 받았다고 합니다.2000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직을 퇴임하며 지급받았는데 현대건설을 비롯해 현대자동차, 현대상선, 현대중공업 등 총 24개 계열사에서 총 217억이 지급되어 총액 1위를 기록했죠.
그중 현대건설이 지급한 액수가 무려 157억으로 단독법인 퇴직금으로 1위를 기록했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1947년 5월 창립 때부터 53년간 대표이사로 근무했기 때문에 평균 월급 7400만 원에 가산 근속연수 212년을 곱한 157억 원이 지급된 것이죠.
8. 왕자의 난
정주영은 죽는 순간까지 편안하지 못했는데 이유는 바로 자녀들 때문입니다.
현대제철 사장이었던 정몽필,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백화점 그룹 회장 정몽근, 전 현대알루미늄 사장 정몽우, 전 현대그룹 회장 정몽헌, 현대중공업 대주주 정몽준, 현대해상화재 회장 정몽윤, 현대기업금융 회장 정몽일, 그리고 장녀 정경희가 모두 경영권 분쟁에 대한 불화를 일으켰었는데요.
그 당시 재벌가 2세들의 싸움으로 현대판 왕자의 난이라 불리며 뉴스에도 나오고 한동안 시중의 화제거리를 독점했을 정도로 매우 유명한 사건이었죠.
9. 박정희 대통령
197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임 할 당시에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소를 건립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정주영은 미포만 해변 사진과 축척 지도,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를 들고 차관을 받기 위해 유럽을 돌았는데
조선소를 짓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강구해봤지만 해결책이 없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었죠.이에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사실을 고했지만 정주영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무조건 해내라'라고 했다고 하는데요.
이에 정주영은 할 수 없이 지시에 따라 해외 온갖 곳을 돌며 허풍을 쳐서라도 어떻게든 조선소를 지을 돈을 빌리려고 사방팔방으로 노력했고 결국 1972년에 울산 조선소 건설에 들어갔으며 이뿐만 아니라 경부고속도로 건설, 자동차 산업 진출 등 정주영이 사운을 걸고 일궈낸 일들이 많습니다.
10. 구두쇠
대기업 회장답지 않게 정주영은 매우 검소한 삶을 살았던 구두쇠로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구멍 난 양말 기워서 신고 다니는 부자가 바로 정주영이었죠.
젊었을 때 서울에서 단칸방에 세를 들어 살 시절에는 나무 장작 값을 아끼기 위해 하루 한 끼만 더운밥을 해 먹고 그 다음날 아침밥은 전날에 지었던 찬밥을 먹었다고 하는데요. 또한 출근할 당시에는 전차 값을 아끼기 위해 집에서 일터까지 걸어 다녔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 담배도 피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배도 안 부른데 뭐 하러 그 연기 뻑뻑 피워서 돈을 쓰냐는 것이었죠.
배우 최불암이 말하는 정주영 회장의 검소함에 대한 일화로는 정주영의 자택에 초청받아 갔을 때 재벌집인데도 욕실 타일이 낡아서 깨져 있는 걸 그대로 써서 놀랐다고 합니다.
11. 경쟁자
정주영은 3명의 경쟁자들이 존재했는데 먼저 현대자동차가 김우중의 대우자동차와 경쟁을 벌였었습니다.70~90년대 당시 현대자동차와 대우자동차는 대결을 벌였는데 정주영은 대우의 아성을 꺾기 위해 현대자동차의 모든 것에 사명을 걸며 김우중과 경쟁을 벌였죠.
자동차뿐만 아니라 버스, 트럭, 중공업에서도 두 사람은 경쟁 관계였다고 합니다. 특히 자동차와 중공업에서 현대와 대우의 경쟁은 90년대가 가장 치열했었죠.
다음 삼성의 이병철과는 국내 최대 재벌로서 재계 1,2위 자리를 놓고 격돌을 벌였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국내에서도 경제적인 주목을 줄곧 받았습니다. 삼성과는 반도체와 백화점, 중공업, 건설업 등 많은 사업 분야들에서 경쟁을 벌였죠.
마지막으로 신격호와도 경쟁을 벌였는데 현대백화점과 롯데백화점으로 경쟁을 했으며 건설업에서도 현대건설과 롯데건설을 통해 신격호와 경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12. 변중석 여사
정주영의 본처 변중석 여사는 조용한 내조로 유명합니다.며느리들에게도 '남의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마라'라고 가르쳐 현대가의 안주인들은 정몽헌 회장 부인 현정은 회장이나 정몽준 전 의원 부인 김영명 여사 등을 제외하면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노현정 아나운서는 결혼 이후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정보를 구하기 힘들 정도로 철저하죠.
또한 변중석 여사 역시 결혼 이후에도 줄곧 욕심 없이 검소한 생활을 했고 집에서는 언제나 몸빼바지 차림이어서 집에 찾아온 손님들은 변 여사를 일하는 아주머니로 착각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검소하고 조용한 내조 이외에도 자신이 낳은 자식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데리고 온 자식까지 태어나자마자 모두 호적에 올려 주었고 첩의 자식으로서 설움을 전혀 받지 않게 키웠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화를 보면 변중석 여사도 굉장히 대단한 인물임을 알 수 있죠.
13. 아산 정주영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에서 첫째로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습니다. 현재 강원도 통천군은 북한 관할인데요.정주영의 호는 고향 마을 아산리의 이름을 딴 아산이며 현대그룹이 전국 곳곳에 세운 아산 병원도 충청남도 아산시와 상관없이 그의 호를 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 앞 태화강을 따라 동구와 남구를 연결하는 도로인 아산로 역시 이 호를 딴 이름입니다.
14. 젊은 시절
젊은 시절에 정주영도 굉장히 비범한데 부친이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 집을 가출한 적도 있다고 하는데요.
후에 소 떼를 몰고 방북했던 것도 이 때문인데 원래 소 한 마리에 이자를 1000배로 쳐서 두 차례에 걸쳐 총 1001마리를 올려
보냈죠.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경리 공부를 하던 정주영은 아버지에게 도로 끌려간 적도 있으며 이후 다시 가출해 인천 부둣가에서 막노동 일을 해 돈을 벌며 서울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정주영은 자수성가에 대표적인 인물이네요.
15. 정주영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세대 기업인 정주영은 아직까지도 전설로 남아있는 인물인데요.정주영은 한국을 가장 빛낸 기업인으로 100년을 책임진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앞으로도 정주영이 남긴 족적을 잊지 않고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포스팅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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